제25호 쇠머리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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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25호 영산쇠머리대기

영산쇠머리대기는 우리나라에서 전승되어온 민속문화재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소박하며 강렬한 향토의 특성을 담아 원형 그대로 보존 전승 되고 있는것으로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영산 쇠머리대기의 유래

영산지방의 靈山인 영축산과 함박산의 두 수려 장엄한 산세에서 연유한다.

태백산 줄기의 남 고봉을 이루어 우뚝 솟아오른 이 두 산은 후미진 九溪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청정한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면서 서로 神靈스러운   精氣와  威熱를 겨루기나하듯 다정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듯한  孤高한형상이라 이러한 두 산의 넘치는 정기와 위세를 和合으로 승화시켜 향토수호의 거룩한 상징으로 삼기 위해 살풀이민속의 하나로 두마리의 힘센황소로 형상화하여 쇠머리대기를 하게된 것이다.

양 산세의 신령스러운 정기와 위세가 이 지방 주민들의 意志와 맥락을 고동치게 하고 있게 된 것이다. 양산세의 신령스러운 정기와 위세가 이 지방 주민들의 意志와 맥락을 고동치게 하고 있으므로 자연 발생적인 민속축제로 전승되어오고 있는것이다. 이 민속축제를 통해 걸러진 주민들의 애향정신,단결력,정의감,용감성,생산의욕,  和合정신은 마침내 임진왜란때 왜구의 침략에 항쟁하였고, 기미 독립운동의 앞장에서 항일투쟁과 그리고 6.25때는 낙동강 전투의 교두보에서서 조국수호에 희생적인 뒷받침을 하게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그 기원은 옛날로 짐작되며, 그 불변의 의지와 맥락은 오늘까지 힘차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쇠머리대기 민속은 두마리의 나무로 만든 거창한 황소의 대결을 놀이화한 것으로 먼저 서낭대 대기와 진잡이 놀이로서 승부를 결정지으며, 나무소의 형상과 제작방법이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이 형상장식 제작방법과 놀이의 전개은 주민들의 자유참여 등의 특색을 고루 갖추어 전승되어 왔으므로 지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우선 쇠머리(나무소)의 제작방법은 생소나무와 짚줄로 통나물를 엮어 머리,어깨,몸통 등을 만든 다음 규격은 대략 머리 높이가 400cm,어깨의 가로 길이가 430cm,이고, 몸통 길이는 560cm 정도가 된다.

그형상은 추상적인 조형미가 뛰어 났는데 여기에 오색천을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또 쇠머리에 소요되는 나무는 대략 60본쯤 되는데,나무를 산에서 벨 때는 고사를 지내며 제작하는 동안은 농악을 치면서 안전을 빌고 흥을 돋군다.

서낭대기

쇠머리대기에 앞서 서낭대기를 한다. 쇠머리대기의 序戰인 셈이다. 서낭은 마을의 상징이며 수호신이다.

왕대(王竹)에 오색천으로 장식한 서낭은 東西양군에서 들고 나온다. 차출된 힘센 장정들이 신명을 독구어 위세를 과시하며 응전태세를 갖추어 대결한다. 

마침내 싸움은 절정에 이르러 장정들은 서낭대를 휘두르고 밀고 치고 덮치는 등 이때  서낭대가 부러지거나 땅바닥에 쓰러지면 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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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잡이놀이

쇠머리대기의 앞놀이에서는 또 진잡이 놀이가 전개도니다. 장정들은 오색 영롱한 깃발과 농악대를 앞세우고, 적진을 향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일대 공방전이 전개된다. 

깃발은 나부끼고 찢어지고 부러지며 상처를 입는 사람도 생기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중들의 열기는 점점 더해지기만 한다.

결전과 승부

서낭대기와 진잡이놀이가 끝나면 근엄하고 찬란한 모습이 유달리 돋보이는 복장을 한 장군들이 나무소를 타고 독전을 위한 칼춤을 추면 흥분된 군중들은 쇠머리를 메어 올리고 농악대와 많은 군중들은 쇠머리를 에워싼다.

또 농악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수많은 군중들의 함성소리는 높아지며 흥분과 긴장에 사로잡힌 두마리의 거대한 소는 위용을 자랑하듯 몇바퀴돌다 마주서는 순간,꽝 하고 머리 부분을 맞부딪히면 까닭 모를 고함소리와 함께 밀어 붙혀 승패는 판가름나고 흥겨운 축제는 그칠 줄 모른다. 

이러한 축제속에 전 주민이 자유롭게 참여하여 슬기와 和合과 友情을 나누면서 來日의 풍요로움을 祈願하는 것이다.